실성 마립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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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실성 마립간은 신라의 제18대 왕이다. 김말구의 아들이거나 미추 이사금의 동생으로 추정되며, 키가 크고 총명했다고 전해진다. 내물 이사금 사후 왕위에 올랐으며, 왜와 우호 관계를 맺고 백제의 침입을 받기도 했다. 고구려에 볼모로 보낸 내물 마립간의 아들 눌지에게 살해당했으며, 눌지가 왕위를 계승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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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실성 마립간 - [인물]에 관한 문서 | |
|---|---|
| 기본 정보 | |
| 이름 | 실성 마립간 |
| 한글 | 실성 마립간 |
| 한자 | 實聖 麻立干 |
| 로마자 표기 | Silseong Maripgan |
| 일본어 | 실세이 니시키 |
| 신라 마립간 | |
| 재위 기간 | 402년 - 417년 |
| 즉위 | 402년 |
| 퇴위 | 417년 |
| 이전 임금 | 내물 마립간 |
| 다음 임금 | 눌지 마립간 |
| 개인 정보 | |
| 성 | 김(金) |
| 휘 | 실성(實聖) |
| 다른 이름 | 실주왕(實主王), 보주(寶主), 보금(寶金) |
| 아버지 | 김대서지(金大西知) |
| 어머니 | 이리부인(伊利夫人) |
| 배우자 | 아류부인(阿留夫人), 석씨 |
| 사망 | 417년 |
| 매장지 | 황남대총(추정) |
| 기타 정보 | |
| 칭호 | 마립간 |
2. 생애
포항 냉수리 신라비에 따르면, 실성 마립간은 신라의 수도인 금성의 탁부에서 태어났다. 삼국사기에 따르면 실성은 키가 7척 5촌[7]이었고, 똑똑하고 빼어나 미래를 보는 능력이 있었다고 한다.
내물 이사금이 죽고 그의 아들이 아직 어려 실성이 대신 왕으로 옹립되었다.[8] 412년 내물 마립간의 아들 복호를 고구려에 볼모로 보냈고, 415년 음력 8월 왜인들과 풍도(風島)에서 싸워 이겼다.
실성 마립간은 복호에 이어 내물 마립간의 또 다른 아들 눌지까지 고구려에 볼모로 보내려다 오히려 고구려의 지원을 받은 눌지에게 처형되었고, 눌지가 그의 뒤를 이어 왕위에 올랐다.
2. 1. 즉위 전
392년 1월, 고구려가 신라에 사신을 보냈을 때, 고구려의 강성함을 두려워한 내물 마립간은 실성을 인질로 보냈다.[3] 당시 고구려는 광개토대왕 즉위 전후로 영토 확장을 꾀하여 끊임없이 대외 정벌을 계속했으며, 경자년에는 신라의 수도 금성(경상북도 경주시)을 포위한 왜군을 임나 가라로 철수시키고 추격했다. 이러한 상황에서 실성은 401년 7월에 신라로 귀국했다.[3] 《삼국유사》 기이·내물왕 김제상 조에 따르면, 내물 마립간이 훙거했을 때 아들이 결코 어리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고구려와의 관계가 깊었던 실성이 국인들의 추대로 왕위에 오른 것으로 보인다.[3]2. 2. 즉위 후 (402년 ~ 417년)
402년 3월, 왜와 우호를 맺고 내물 마립간의 아들 미사흔(未斯欣)을 볼모로 보냈다.[9] 403년 7월, 백제의 침입을 받았으나 자세한 기록은 없다. 405년 4월, 왜가 명활성을 공격했으나 실패했고, 실성 마립간이 직접 기병을 이끌고 퇴로를 막아 3백여 명의 왜군을 죽이거나 사로잡았다.[10] 407년 3월과 6월, 왜는 다시 동쪽과 남쪽으로 침입하여 노략질을 해 백여 명의 주민들이 피해를 입었다.408년 2월, 왜인들이 대마도에 군영을 설치한다는 소식을 듣고 실성 마립간은 선제공격을 계획했으나, 서불한 미사품이 "'무기란 흉하며, 싸움이란 위험하다'란 말이 있습니다. 하물며 큰 바다를 건너 타국을 치다가 실패한다면 후회해도 소용이 없습니다. 그보다 험한 곳에 의지해 관문을 설치해 두었다가 그들이 오면 막아 우리를 어지럽히지 못하게 하고, 유리할 때 나가 사로잡는 것이 좋을 것입니다. 이것이 곧 남을 이용하며 이용당하지 않는 계략으로, 대책 가운데 으뜸일 것입니다."라고 조언하여 그의 말을 따랐다. 이는 신라의 대왜 방위전력이 되었다.
412년, 내물 마립간의 아들 복호를 고구려에 볼모로 보냈다.[4] 415년 8월, 왜인들과 풍도(風島)에서 싸워 이겼다. 413년에는 평양주[5]에 큰 다리를 신설했다.
2. 3. 최후
《삼국사기》 신라본기 실성 마립간기에는 "재위 16년인 417년 5월에 훙거했다."라고만 기록되어 있다.[7] 그러나 《삼국사기》 눌지 마립간기 및 《삼국유사》의 기록에 따르면, 실성 마립간은 내물 마립간의 아들 눌지를 죽이려다 오히려 눌지에게 살해당했다. 실성 마립간은 고구려에 인질로 보내진 것에 대한 원한 때문에 눌지를 죽이려 고구려인에게 의뢰했으나, 그 고구려인이 눌지에게 실성 마립간의 해로운 의도를 전하여, 눌지가 먼저 실성 마립간을 살해하고 왕위에 올랐다고 한다. 《삼국유사》 기이 제18 실성왕조에서는, 눌지를 죽이도록 의뢰받은 고구려인이 눌지의 인품을 보고 오히려 실성 마립간을 죽이고 눌지를 왕위에 올렸다고 한다. 어느 기록에도 실성 마립간의 매장지는 전해지지 않는다.3. 가계
- 아버지 : 김대서지
- 어머니 : 이리부인 석씨(伊利夫人 昔氏) - 아간 석등보의 딸
- 왕후 : 아류부인 김씨(阿留夫人 金氏) - 미추 이사금의 딸
- * 딸 : 아로부인 김씨(阿老夫人 金氏) - 눌지 마립간의 왕비
- * 딸 : 치술공주(鵄述公主) - 박제상의 부인
4. 평가 및 의의
실성 마립간은 고구려와 왜에 인질을 보내는 등 주변국과의 외교 관계를 통해 신라의 안정을 도모하려 했다.[9][4] 그러나 405년 왜가 명활성을 공격하고,[10] 407년에는 동쪽과 남쪽으로 다시 침입하여 노략질을 하는 등 잦은 왜의 침입과 403년 백제의 공격으로 인해 국력이 약화되었다.
내물 마립간의 아들들을 제거하려 한 시도는 결국 자신의 죽음을 초래했고, 신라 왕위 계승에 혼란을 야기했다. 《삼국사기》에는 417년 5월에 훙거했다고만 기록되어 있지만, 눌지 마립간에 의해 살해된 것으로 명기되어 있다. 《삼국유사》에는 눌지를 죽이도록 의뢰받은 고구려인이 눌지의 인품을 보고, 오히려 실성 마립간을 죽이고 눌지를 왕위에 올렸다고 한다.
경상북도 경주시의 황남대총(98호 고분) 남릉을 실성 마립간의 왕릉으로 추정하는 설이 있다.[6]
5. 실성 마립간이 등장하는 작품
참조
[1]
뉴스
Park Je-sang, Silla's Loyal Subject
https://world.kbs.co[...]
KBS World
2024-03-16
[2]
뉴스
Park Je-sang, Silla's Loyal Subject
https://world.kbs.co[...]
KBS World
2024-03-16
[3]
문서
奈勿尼師今에는長子の訥祇(後の訥祇麻立干)、卜好(別名として宝海)、未斯欣(別名として美海、未叱希、未叱喜、微叱許智)があって、第3子の未斯欣(美海)が倭国に人質として送られたのが『三国史記』では実聖尼師今元年[[壬寅]](402年)、『三国遺事』では奈勿尼師今36年[[辛卯]]([[391年]])であり、そのときに10歳であったとする。[[好太王碑|広開土王碑]]文によれば、[[倭国]]が[[新羅]]を攻めて服属させたのが「[[辛卯]]年([[391年]])」であるため、未斯欣が人質として倭国に送られた記年は『三国遺事』のほうが妥当であると考えられている。
[4]
문서
『[[三国史記]]』では「[[412年]]に、高句麗に対して先王の第2子の卜好(宝海)を人質として送った」とあるが、『三国遺事』紀異・奈勿王金堤上条에拠れば、次の「訥祇麻立干の3年([[419年]])に、訥祇麻立干の弟の宝海を高句麗に人質として送った」と記されている。
[5]
문서
『三国遺事』紀異・第十八実聖王条では平壌州を当代(13世紀)の楊州([[京畿道]][[議政府市]])とするが、新羅が京畿道付近を領有するようになるのは7世紀になってからのことである。(→井上訳注1980 pp.90-91.)
[6]
문서
由水常雄は、新羅出土の王冠については通常は首長(王)には金冠を伴うところが、98号墳では王妃陵に金冠が見られ、王陵には銀冠が見られる。この銀冠の特徴が高句麗的であることと王よりも王妃のほうが国内では高く評価されていることに着目し、金氏王統の初代王である味鄒尼師今の娘を王妃とし、自らは傍系であるためもとは王の配下であり高句麗に人質として訪れていた実聖尼師今を王陵の被葬者であると考えた。(→由水2001)
[7]
문서
약 173cm 혹은 184cm로 추산. 당시 척을 23cm 혹은 24.5cm 정도로 본다.
[8]
서적
삼국사기
[9]
서적
삼국사기
[10]
서적
삼국사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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